작고 가벼워진 어머니가 주렁주렁 탯줄에 매달려 계신다 숨을 주는 줄 젖을 주는 줄 오줌을 빼는 줄 피를 깨끗이 돌려주는 줄 갖가지 초현대식 기계엄마들이 태반을 대신해 열심인데도 어머니는 자라지 않고 자꾸 작아지신다 눈 맞춤도 못하고 옹알이도 잦아들고 까무룩 잠만 길고 깊어진다 준비도 없이 숨 받아 세상에 왔는데 정리도 없이 숨이 꺼져가고 있다 목련 꽃봉오리들은 뽀얀 젖빛으로 또다시 태어나고 어머님 살갗에는 자목련 꽃잎이 피어나고 있다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
저쪽 벼랑까지는 출렁이는 외길 서둘러 도착한 저녁은 젖어 있고 산과 호수, 고요가 깊다 어둑한 한 쌍이 흔들다리를 건넌다 불안과 견고 위태와 안정 사이 느슨하고도 팽팽한 긴장이 손바닥에 흐른다 걸음을 인도하는 건 믿음 흔들리는 마음을 서로에게 가까스로 붙들어 맨 균형이 미끌, 아찔하다 당신까지의 거리는 언제나 곡선 천천히 흔들리며 조심스레 당도하기로 한다 우리 사이, 출렁다리 위에서 문득 저물어버린다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
한 칸에 한 사람씩 이름을 채워본다 가족 친구…… 문턱 낮추고 왕래한 사람들……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을까 고민과 불면을 바꾼 시간이 내 관계의 삶을 만들었는데 내밀한 것들은 어느 칸에 적을까 나에게 꽃을 달아준 사람 부를 수 없는 이름은 어디쯤에 끼워 넣을까 화이트리스트는 점점 짧아지고 블랙리스트는 자꾸만 길어져 나 두서없이 어두워지는데 화이트리스트 맨 위 칸에 슬며시 그를 앉힌다 비밀한 죄 하나 받아 평생 속죄하고 싶은데 나는 과연 그의 어느 리스트 어디쯤 올라있는지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넣고 빼고 수정하며 사랑의 꿈보다 달콤한 꿈에 빠져보기도 하는데 앳 리스트(At least), 최소한 내 사랑하는 이들 잔금 많은 두 손바닥 명부 칸칸에 삭제되지 않는 등본으로 새기고픈 마음 잠시 내려놓고서…… 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 *프란츠 리스트의 <사랑의 꿈>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
몽골의 조랑말은 나를 태우고도 기회만 되면 멈춰 서서 풀을 뜯었다 양과 염소들도 깨어 있는 내내 대지에 고개 숙여 풀을 먹는다 저 먹이활동이 즐거운 휴식인지 마지못한 노동인지 궁금했다 식사=휴식이라는 통념은 늘 옳은 걸까 핸드폰 속 세상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빵 한 조각 허겁지겁 베물고 일어 서는 인간의 식사도 있다 혀의 쾌락도 없이 위루관으로 뱃속에 죽을 욱여넣던 루게릭병 친구 휴식도 노동도 아닌 그 순간 눈망울은 말보다 낙타보다 크고 글썽했다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니 자연의 섭리를 넘어선 걸까 허기가 인류의 문명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명제를 되새김질해 본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엄마 품에 안겨 당당히 허기를 채우던 첫 밥의 힘이 지상의 식사를 끌고 간다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
이 미터면 되겠나 그대와 나 사이 거리 말뚝마다 하나씩 앉은 저 갈매기들의 거리 만큼이면 좋지 않겠나 아득히 보이지 않던 그대 얼굴 정말 한 아름 거리에 오기는 하는 건가 밀접했던 마음은 그만큼 더 띄워야 하는 건가 사회적 거리는 물리적 거리 심리적 거리도 멀어지는가 내 옆자리는 언제나 비어 있는데 닿고 싶어 닿고 싶어 네가 없어 키 커진 그림자만 텅 빈 거리를 오래 서성인다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
보이지도 않는 검은 그림자가 지구 상공을 누볐다 불행히도 불안은 비껴가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는 수액처럼 지상에 스며들었다 뉴스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끝이 안 보이는 배급 줄 맨 끝에 내가 떨며 서 있었다 격리와 고립이라는 초유의 현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마녀사냥당하듯 죄인이 되고 서로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추궁했다 총성도 없이 선전포고가 이어졌다 마스크 두 장을 다 쓰고 창문 닫고 머리까지 이불을 덮어 올렸다 그날 밤에도 나는 낡은 잠옷 바람으로 보이지도 않는 배급 줄의 꼬리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시 푸르러 맑아진 지구를 검은 그림자가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
유난히 더 노란 봄이 왔다 산수유꽃들까지도 바이러스 왕관*을 쓰고 있었다 꽃구경 다녀간 사람들이 왕관에 감염되었다며 모든 꽃놀이를 금지한다고 했다 만개한 유채꽃밭을 트랙터가 갈아엎었다 천지는 더 노랗게 뜨거나 하얗게 질렸다 부고도 없이 바람에 떨어져 사라지는 혼들이 매일같이 봄밤을 흔들었다 비말처럼 기침처럼 혹은 각혈처럼 꽃잎들은 숨죽여 죄인처럼 피고 졌다 세기적 봄날들이 역사책에 붉은 꽃잎으로 각인되며 고개를 떨어트린 채 흘러갔다 * 코로나(Corona) : 라틴어로 crown(왕관) 혹은 halo(후광, 광배)를 의미한다. 이영혜 원장 -2008 《불교문예》 등단 -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-서울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초빙 부교수 -박앤이서울치과의원 원장 -시집 《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》